영원과 하루
영원과 하루
신지현
«영원과 하루»는 ‘연결감’을 키워드로 전시의 내외를 관통하는 이야기를 펼친다. 2인전 형식을 통해 만나는 두 작가는 모두 현재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에 대한 관심을 화두로 다루며 작업을 개진시킨다. 전시는 각자의 작업적 고유성을 드러내는 동시에 유의미한 결절점을 찾는 일, 그것의 가능성을 타진해 보길 시도한다. 작업 내부를 관통하는 기제는 당연하게도 ‘연결감’이다. 불연속적 시공을 이어 붙여 나와 너를 연결하며 하늘과 바다, 우주를 한눈에 보는 것. 떠남과 머무름, 탄생과 죽음, 어둠과 빛으로 치환되는 그 모든 것. 가까이 있지만 함께는 아닌 그것은 모두 ‘영원과 하루’에 대한 은유이자 귀속이다. 시간의 흐름과 공간의 한계를 흐트러뜨려 삶과 사랑, 죽음에 대한 생각을 전복시키자. 전시장에 흩어진 두 작가의 수십 개의 작품이 말하고자 하는 바 크게 다르지 않다. 이들이 한데 모인 이유이자 당위성이 되겠다. 우리는 선형적 흐름을 거부한다. 우리는 명료하기보단 자유롭길 선택한다. 우리는 마주하며 사라짐을 지향한다.
전시는 김아름의 <Heart>(2019)와 수연의 <부드러운 미래>(2021)에서 출발한다. 김아름과 수연의 작업은 공통적으로 어떠한 형태를 연상시키지만 가시 세계의 사물과 정확히 조응하지는 않는다. 이들이 가시화시키는 비가시적 세계는 개별적이고 다층적이며, 감정적이고 동시에 자유롭다. 전시는 김아름과 수연의 그림을 관습적 역사로부터 이탈하며 사랑과 도발, 연결과 유대, 초현실주의와 신비주의를 잇는 급진적인 그림으로 바라본다.
사랑, 연결, 떠남.
<WOODEN INUIT MAPS>, 1885, Wood, 5 inches by 2 inches (left), 8.5 inches by 1 inch (right). FOUND: Ammassalik, Greenland. © Greenland National Museum and Archives
이누이트족은 ‘촉각 지도’로 방향과 위치를 파악한다. 지역이나 개인마다 다르게 사용되기에 특정한 기준이나 체계가 없는 이 지도는 눈밭 위에서 발로 지형을 느끼고 빛과 바람, 눈과 얼음의 특징을 살피며 미묘한 변화를 감지해 일상을 꾸려 나간다. 수천 년 동안 환경에 적응해 온 방식을 반영하는 문화적이고 경험적인 지도라 할 수 있겠다. 자연의 변화와 생명력을 이해하고 자신에게 발달한 감각을 활용하며 삶의 방식을 만들어 온, 그러나 동시에 개별적이기에 몹시도 추상적으로 비치는 이들의 지도를 보며 김아름의 작업이 떠올랐다. 매일매일 충실히 눈앞의 자연을 살피며 같은 장소의 다른 모습을 채집해 오는 그의 시각적 습관은 현재의 좌표이자 미래의 방향성을 가늠하기 위한 길라잡이로서 작업에 반영된다. 한 시기를 지배하는 감정, 언젠가부터 자꾸 눈에 들어오는 모양에 대한 관심이 작업적 모티브로 이어져 온 김아름의 작업 세계는 약속된 기호로써 내·외면의 모습을 그려낸다는 점에서 지도와 닮아있다.
김아름의 미래를 생각하는 시선과, 미지의 세계로 떠나는 여정(<우리는 매일 새로운 길을 가고 있다는 걸 알지 못해.>(2023))은 작업 안에서 새로운 길(과 모양)을 상상하게 한다. 그는 사람과 자연, 사람과 사람의 관계, 그 안에서 형성되는 사랑, 시간에 따라 흐르는 마음의 방향 등 존재가 연결될 때 만들어질 수 있는 풍경, 기호, 언어를 상상한다. 그것은 다소 모호하지만 그렇기에 어떤 형상과도 자연스럽게 융화되며 다시 만나기를 허여한다.
그는 시각적 이미지의 출발점으로 자연 속 덩굴의 곡선을 가져온다. 덩굴은 주변을 감싸며 전체로 뻗어나가는 성질을 갖는다. 자연 속 자유롭게 엉켜있는 곡선의 모양새는 그야말로 유일무이하다. 그는 이를 모사하는 과정으로 시작해 이내 새로운 추상적 모양을 발견해 나아간다. 추상적 모양은 또 다른 실루엣이나 형상을 다시금 유도하며 새로운 형태로의 이행을 시도한다. 그의 작업적 태도는 작업 간의 관계성에서도 드러나는데, 작업 전반에 등장하는 몇 가지 도상들이 있다. 물방울, 하트, 나비, 꽃, 손, 새… 여기에서 이어지는 부드럽게 흐르는 덩굴, 덩굴의 곡선이 만들어 내는 실루엣과 자동차, 절벽과 지도. 전체가 하나로 귀결되듯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도상들은 사랑, 연결, 떠남을 은유한다. 작가가 천사라고 부르는 날개 달린 하트 새는 <당신이 여기에 온다면, 당신은 숨은 보석을 찾을 수 있어요.>(2023)와 <사랑의 물방울들>(2023)을 넘나들며 포착되는가 하면 간결한 선으로서 드러나는 마주한 두 사람의 실루엣 역시 같지만 다른 모습으로 반복된다(<둘>(2023), <두 사람>(2023), <사랑은 당신의 모래 위에 나비가 날아다니는 것>(2023)). 김아름의 크고 작은 스케일의 화면 속 세계는 삶이라는 영원의 개별적이고도 경험적인 지도(<지도 – endless trip>(2023)를 완성해 나가는 여정으로서 한 시기를 감각하고 기록한 결과물이다.
눈여겨 볼만한 주요한 방법론은 칼선 긋기이다. 그에게 칼선은 붓을 대신하는 하나의 도구이다. 김아름의 작업에서 색은 부드럽게 스미는 포용의 감각에 가깝다고 한다면, 칼집의 날카로움은 일종의 긴장을 구현한다. 세필보다 얇고 섬세하지만, 힘이 있는 선을 긋는 도구로 선택한 칼은 스스로 색을 내지 않으면서도 미묘한 차이를 만들어 냄으로써 작업의 전반적인 균형을 세운다. 주로 종이에 수채물감을 주재료로 사용해 얇게 색을 구사하는 작가의 작업에서 칼집은 조형적 입체성을 부여하며 자연스럽게 오리기, 붙이기, 접기와 같은 행위로 이어진다.
김아름의 전체적인 조화를 생각하며 우연을 받아들이고 즉흥적 선택을 마다하지 않는다는 자유로운 성향은 비슷한 감각을 공유하는 듯 보이는 수연과의 큰 차이점이기도 하다. 흐르듯 내버려 두고 다가오는 미세한 변화를 포용하는 김아름의 태도는 그의 그림이 놓인 모양새–테이블에 툭 걸치거나 벽에 기대어 놓는 선택–와도 닮아 있다.
동그라미, 집, 나.
집, 원, 별, 물줄기 등 수연의 세계 안에서 특정 기호로서 등장하는 몇몇 도상은 마치 등장인물과 같다. 집은 자신을, 한 쌍의 기호는 두 사람(의 관계)을 은유한다. 둘의 마음이 가까워지고 맞닿는 순간, 연결의 감각을 한 장면에 표현하기 위해 그는 불필요한 요소들을 제거하고, 더 생략될 수 없는 가장 정제된 선으로 형태를 기록한다. “복잡한 세계를 단순한 기호들로 압축시켜 표현함으로써 광활하고 불가해한 이 세계를 개인이 감당할 수 있는 크기와 형태로 바꾸길 시도한다”는 작가의 말마따나 “최소 단위의 페인팅”이 되겠다. 연결된 감각은 이전에 존재하지 않았던 새로운 마음의 풍경을 열어주고, 그 풍경은 공간을 유영하는 곡선과 도형들의 어울림으로 간결하게 묘사된다. 이렇듯 나에서 시작해 타인, (개인적·사회적) 관계를 구성하는 최소한의 요소를 그림으로 구성해 나아가는 수연의 작업은 단출한 화면 구성에서 감지 가능 하듯 조형성에 있어서 만큼은 즉흥적 선택을 최대한 배제한다. 그의 작업 안에서 비교적 자유로운 감각이 포착되는 모눈종이 드로잉에서 한편으론 수수께끼 같은 수연의 작업에 대한 힌트를 더 많이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모눈종이는 일정한 간격으로 가로줄과 세로줄이 만나 교차점을 이루어 규칙적인 그리드를 기본값으로 갖는다. 수연은 ‘매일 같은 길이로 주어지는 하루’에 대한 은유로써 모눈종이를 선택하고, 여기에 하루의 인상을 기록한다. 작업의 흐름을 통해 이야기를 상상하게 하는 김아름과는 달리 ‘잘 구성된 화면 그 자체를 만드는 것’에 더 관심이 있는 수연은 일상에서 자극을 감각하는 사소한 순간, 사물, 사건을 흘려보내지 않고 모눈종이에 담는다. 문 없는 집들, 놓여진 꽃, 시계, 바람개비, 흔들리는 그리드, (한 쌍 아닌) 하나의 원, 아치에 달라붙은 수많은 기호까지. 그림 속 요소들 중 무엇 하나 상징 아닌 것이 없다고 생각한다면 이 작은 화면은 수연의 복작했던 하루의 미장센이다. 다른 작업에 비하자면 즉흥성의 선과 색이 눈에 띄는 이 드로잉들은 선별된 화면을 구성해 온 수연의 작업 안에서 좀 더 열린 태도로 감각을 담아내기 위한 시도의 결과물들이라 하겠다. 모눈종이라는 지지체에 기본값으로 깔려있는 그리드의 규칙성이 여기에서 수연에게 조금 더 자유로운 시도를 할 수 있도록 뒷받침해 주는 역할을 한 것 아닐까 생각하게 된다.
한편 이번 전시에서 새롭게 시도하는 것은 천 작업이다. 천 역시 모눈종이와 마찬가지로 씨실과 날실이 교차하며 전체적인 색 면을 이룬다. 은은하게 빛을 투과하면서도 약간의 힘과 볼륨이 있는 노방, 옥사 등 천의 성질은 그의 다른 (지지체를 사용한) 작업들과 닮아있다. 조형의 대상은 여전히도 드로잉 혹은 페인팅으로 여러 차례 등장해 온 최소 단위의 도상들이다. ‘그리기의 태도’로 ‘만들어 내는’ 그의 천 작업은 얇게 올린 색연필 드로잉이 겹겹이 쌓인 선과 색의 질감을 담아내고, 묽게 스치듯 올린 아크릴 작업이 물의 질감을 담아냈듯 빛의 질감과 바람의 움직임을 받아들이며 작업과 이 세계를 연결 짓는다. 수연과 김아름 둘 다 수용성 재료의 부드러운 색감을 사용한다는 공통점이 있지만 김아름의 그것은 보다 날것의 느낌이 담겨있다면 수연의 색은 정돈된 감각을 담아낸다는 점에서 둘은 다시 한번 차이점을 갖는다. 염색된 천이 만들어 내는 고운 색과 얇게 반짝이는 스티치는 수연의 다른 작업과 다르지 않게 최소의 최선만을 담아낸다. 이렇듯 일관된 감각을 공유하면서도 여러 지지체 간 실험을 오가는 수연은 자신만의 외피를 여러 겹으로 지어나가는 중이다.
하늘로 오르기를, 땅으로 흐르기를.
여기 모인 김아름, 수연은 진지하지만 무겁지 않게, 삶 속에서 마주했던 순간과 감정을 그림으로 붙잡으며 새로운 시공으로서의 영원 만들기를 시도한다. 전시 공간을 복수의 레이어로 감싸듯 구성된 «영원과 하루»는 테오 앙겔로풀로스(Θεόδωρος Αγγελόπουλος)의 동명의 영화에서 제목을 차용했음을 밝힌다. 영화가 흩어진 시어를 모았듯, 나선형 계단을 올라 도착한 이곳에서 흩어진 이미지와 상징을 모아 서사를 꿰어내자. 글의 출구이자 전시의 입구로 기획자가 주운 시구를 남긴다.
“어쨌든 나는 너를 사랑해. 너는 내 몸 전체에 박혔어. 그리고 이건 너와 상관없는 일일 거야, 아마.”[1]
[1] 김혜순, < 겨울 나무> 중 발췌. 『불쌍한 사랑기계』(1997, 문학과지성사) 62쪽 수록.
영원과 하루
2023. 5. 17 – 2023. 6. 16
화–일 12시–18시, 매주 월요일 휴관
참여작가
김아름
수연
기획, 글
신지현
그래픽 디자인
남기림
설치 도움
정진욱
Eternity and a Day
2023. 5. 17 – 2023. 6. 16
Tue–Sun 12–18pm, Closed on Mondays
Artist. Areum Kim, Suyeont
Text, Curated by Jihyun Shin
Graphic design by Kirim Nam
Thanks to Jinwook Jung
Related publication

Read More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