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리 찌는 살
제안자로서
이성휘
1. 이 전시는 지난 5월, 이성휘가 작가 박형지의 ‘프레 스튜디오(Pre-studio)’ 강의를 듣는 학생들에게 건넨 제안이 수락됨으로써 시작되었다. 제안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2. 오늘날 미술계의 한해 풍경은 각종 공모전이나 지원금 제도들이 주도한다. 이 제도들은 전체가 아닌 일부, 혹은 소수에게 수혜가 돌아가기 때문에 계량화나 객관화가 쉬이 이뤄질 수 없는 미술에 대해, 평가기준이라고 하는 나름대로의 잣대를 제시한다. 그러한 제도의 잣대에 대하여 상당수는 열심히 스스로를 적응시켜 나가며 선택 받는 일부가 되기 위해 노력하곤 한다. 그리하여 제도의 틀에 잘 맞는 모양새가 되어 버리고 나면, 우리는 스스로 미술을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픽업하는 제도에 의해 좌우되고 마는 것이다. 만약 스스로가 미술계 내에서 잘 버티고 있다고 생각된다면, 이는 자신이 제도가 공고해지는데 혁혁한 공을 세웠거나 적어도 일조했을 수 있다. 나 역시 이미 제도 내의 오염원 중의 한 사람으로서 이 제도를 완전히 벗어나거나 반목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아직 오염되지 않은 사람들에게 한두번쯤은 스스로 작업을 판단하고 결정하는 고통과 희열을 맛본 후에, 공모와 지원금 제도가 오염시킨 바다로 뛰어들기를 권하고 싶다. 손바닥만한 드로잉이든, 시든, 몸짓이든, 곧 덮어버릴, 또는 곧 부서질 무엇이든 간에, 2020년 8월 여름, 당신이 결정한 작업을 가지고 웨스 서울에서 만날 수 있을까?
3. 모두 열 두명이 작가로서 참여를 결정하였고, 이들의 동급생 두 명이 기획팀에 자원하였다.
4. 전시 참여 당사자들, 그리고 관람자들은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해볼 수 있을 것이다.
5. 누가 작가를 규정하는가?
6. 누가 전시의 자격을 부여하는가?
7. 누가 전시할 작품을 결정하는가?
8. 기획이란 무엇이고 기획자가 하는 일은 무엇인가?
9. 자본은 전시를 가능케 하는가?
10. 누가 전시를 평가하는가?
11. 우리는 제도를 벗어날 수 있는가?
12. 우리는 다양성을 만들고 있는가?
13. 제안자인 이성휘는 다음과 같이 생각 중이다.
14. 작가는 직업이기도 하지만 역할이기도 하다. 역할로 시작하여 직업이 된다.
15. 제도에 귀속되어 있는 자들이 심사위원이 된다.
16. 작품을 통해 발언이 필요한 자들이다.
17. 기획은 역할이자 도구이다. 기획자가 하는 일은 역할을 만들고 스스로를 도구화 하는 일이다.
18. 자본은 전시를 가능케 한다. 단, 자본과 자유는 반비례다.
19. 당신.
20. 우리는 우리의 몸부림으로 인해 제도의 모양을 바꿀 수 있다.
21. 자본과 제도는 다양성을 가로막는 이들의 권위 쪽으로 향해 있다.
22. 자본과 제도가 작가를, 큐레이터를, 그리고 미술을 소비해버리는 방식에 우리가 쉽게 길들여지지 않기를 바라며, 모순으로 가득 차 있을지라도 또 다른 쓰임의 길을 모색하면서 이 제안은 실행되었다.
⟪미리 찌는 살⟫ 1차(2020.8.17-28) 참여작가 및 작품들에 대하여
김서인, 김혜진
김민주
<Give me love>, 2020, acrylic on canvas, 165.5 × 213.5 cm
모두가 동의하지 않은 불합리적인 규칙이 있다. 낙인, 나이에 따른 규칙, 여성으로서 겪었거나 이슈가 된 사건들은 개인의 정서를 혼란으로 빠트린다. 부조리로부터 벗어나 이상적 사회를 꿈꾸지만, 혼란스러운 개인은 혼자의 힘으로 벗어날 여력이 없다. 민주는 이러한 규칙들을 폭로하는 동시에 위로와 포용의 메세지를 전한다. <Give me love>는 사회의 불합리한 규칙 속에서 억눌렸던 생각과 불만들을 표출한 회화 작업이다. <1, 2, 3, 4, 5…10>에서는 암묵적으로 합의된 규칙이 있는 현대 사회를 살면서 겪는 부조리와 경쟁 속에서 잠식되는 개인과 스스로를 위로한다. (글. 김혜진)
김소이
<눈빛 기계>, 2020, moving image, 1 min 25 sec
<눈빛 동력원>, 2020, mi×ed material on canvas, 111 × 166 cm
타인의 시선은 때로 무기력한 개인을 움직이게 한다. 소이는 SNS, 영상 플랫폼 속에서 자신의 걸음을 잃고 타인의 시선에 의해 만들어진 삶을 살아가는 것을 정지된 평면 속 ‘기계’로 묘사한다. <눈빛 기계>와 <눈빛 동력원>은 이러한 응집된 시선 동력원을 이용해 개인은 회전하고 파편화되며 움직임의 가능성을 보여주지만, 결국 평면 매체 위에서 부자연스럽고 인위적인 움직임에 그치는 것을 보여준다. (글. 김혜진)
손지형
<Hi-Fi>, 2020, oil on canvas, 162.2 × 130.3 cm
<Hi-Fi>, 2020, oil on canvas, 162.2 × 130.3 cm
<Hi-Fi>, 2020, plaster on canvas, 20 × 27.4 cm
카메라 보정 앱 속의 피부 표면은 잡티 없이 매끈하고 화사하다. 사람들은 화면 밖에서도 그러한 표면을 만들기 위해 많은 노력을 들이지만, 현실의 표면은 화면 속의 표면처럼 완벽해질 수 없다.
지형에게 물감은 지극히 현실적인 재료다. 캔버스에 고른 두께로 깨끗이 바르기도 어렵고, 아래로 흐르거나 자국이 남는 것을 막을 수도 없다. <Hi-fi> 시리즈는 이러한 ‘재료의 불완전함’을 바라보는 지형의 시선을 담고 있다. 지형의 그림 속 물감은 불완전한 변수를 숨기지 않고 드러낸다. 자연스럽게 흐르고 고르지 않게 발리며 만들어진 ‘완벽하지 않은 물감의 표면’은 물감만이 가질 수 있는 매력적인 불완전함이 된다.
<Hi-fi> 시리즈 중 하나는 물감이 아닌 석고를 발랐다. 석고는 전통적 조각의 대표적인 재료로서 다른 대상을 재현하는 데에 오랜 기간 사용된 재료다. 지형은 석고를 캔버스에 그림의 방식으로 표현해 석고의 불완전함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며, 물감과의 차이를 드러내 ‘재료의 불완전함’을 ‘재료만의 독자적인 특징’으로 재해석한다. (글. 김서인)
송민지
<닦은 벽>, 2019, oil on canvas, 65.1 × 53 cm
<오른쪽 천장>, 2019, oil on canvas, 72.7 × 60.6 cm
<무제>, 2020, acrylic, pins, tapes, cotton paper and coarse paper, dimensions variable
작업은 재료를 통제하는 일의 연속이다. 형태를 그리거나 조각하고, 설치하는 일까지도 작가의 의지로 이루어진다. 하지만 가끔 재료가 작가의 통제를 벗어나는 때가 있다. 붓이 닿지 않은 방향으로 물감이 튀거나, 물감이 스민 종이가 휘어버리기도 하고, 벽에 고정한 종이가 중력을 이기지 못하고 찢어지기도 한다.
민지는 작가의 의지 밖에서 일어나는 재료의 우연적 변화를 ‘재료의 의지’로 인정하고 존중한다. 민지가 물감과 종이를 민지의 의지대로 통제하면, 물감과 종이가 다시 그들다운 방식으로 변화하고, 민지는 다시 작업에 개입해 의견을 제시한다. 이것은 민지와 재료가 각자의 의지 사이에서 균형을 찾아가기 위해 벌이는 의사소통이다. 이 과정에서 민지는 재료와 싸움을 일으키기도, 재료의 말을 적극적으로 경청하기도 한다. 민지는 재료와의 반복되는 대화를 통해 도달한 합의점에서 자신의 작품과 ‘자연스럽게 만나기를 추구’하며, 그 대화 과정을 고스란히 작품에 남기고자 한다. (글. 김서인)
유수민
<폭력적인 과일-아보카도>, 2019, oil on canvas, 90.9 × 72.7 cm
<폭력적인 과일-올리브>, 2019, oil on canvas, 90.9 × 60.7 cm
<폭력적인 과일의 반격>, 2019, acrylic on canvas, 90.9 × 72.7 cm
아보카도가 전 세계적인 인기를 누리며 멕시코에서는 아보카도 쟁탈전이 벌어지고 있다. 멕시코의 ‘아보카도 마피아’는 아보카도를 독점하기 위해 농장주를 납치, 살해하고 있으며, 빈민들은 아보카도를 훔치다 목숨을 잃기도 한다. 아보카도 농사를 위한 대규모 산림 벌채는 이미 흔한 일이 되었다. 인기를 끌고 있는 또 다른 과일인 올리브를 둘러싼 상황도 다르지 않다. 올리브의 주요 산지인 이탈리아에서 올리브 농업은 마피아의 큰 수입원으로 자리 잡았다. 이들은 올리브를 저가로 경작하기 위해 외국인 노동자들을 불법으로 착취하는 것은 물론, ‘가짜 올리브유’를 만들어 팔아 많은 사람의 목숨을 위협하고 있다.
수민의 <폭력적 과일 시리즈>는 세계적으로 각광받는 과일인 아보카도와 올리브를 둘러싼 인간들의 폭력적 실태에 관한 작업이다. 수민은 인간이 먹기 위해 재배하는 과일, 그중에서도 ‘건강식품’이라는 이미지로 선풍적 인기를 끌고 있는 아보카도와 올리브의 재배가 인간에게 다시 위협으로 돌아오고 있는 모순적 상황에 주목한다. 그림 속 과일 캐릭터들은 마치 사람처럼 표정을 가지고 있으며, 커다란 몸집으로 위협적인 빛을 뿜기도 한다. 키치한 표현으로 그려진 과일들의 이 우스꽝스러운 모습은 이 폭력적인 상황을 이해가 불가능한 하나의 촌극처럼 느끼는 수민의 시선을 담고 있다. (글. 김서인)
정민
<무제>, 2020, moving image, 2 min 37 sec, loop
민은 불편함을 야기하는 사소한 특정 행위들에 주목한다. <무제>는 행동과 행위에서 오는 미묘한 감정 유발에 초점을 맞춘 스톱 모션 작업이다. 대상과 상황, 장소를 설정해 어떠한 행동 후에 오는 불편함과 기괴함을 관람객이 느끼게끔 한다. (글. 김혜진)
조휘경
<The opposite side of screen memory>, 2020, watercolor, tempera on canvas, 90 × 145.5 cm
<The opposite side of screen memory>, 2020, print on fabric, 140 × 210 cm
<The opposite side of screen memory>, 2020, watercolor, tempera on canvas, 145.5 × 97 cm
<The opposite side of screen memory>, 2020, digital C-print, 10.2 × 15.2 cm
휘경에게 그림과 사진은 다면체의 면처럼 서로 다른 곳을 바라보지만 자기 자신이라는 같은 곳에서 출발한다는 점에서 크게 다르지 않은 매체다. 휘경은 자신이 각각의 매체를 통해 어디를 보고 있는지, 왜 서로 다른 곳을 바라보는지를 고민하며, 매체를 통해 세상을 보는 관점, 그 관점이 매체마다 달라지는 이유, 또 그것을 고민하는 태도까지 모두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인다. 자신을 마구 구분 짓거나 자신의 다양한 관점 중 하나를 소거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를 인정함으로써 ‘평등한 나의 세계’를 구축하는 것이다.
함께 전시된 그림과 사진은 어느 하나에 종속되거나 의존하지 않고 평등하게 독립된 작업으로써 제목을 공유하고 있다. 작품들은 서로 색감과 구도 면에서 닮아있기도 하고, 또 어떤 면에서는 완전히 다르기도 하다. 제작 과정에서부터 설치 단계에 다다르기까지 서로를 끊임없이 의식하고 있는 작품들을 통해 휘경이 스스로와 가졌던 치열한 소통의 시간을 엿볼 수 있다. (글. 김서인)
최서현
<잔물결>, 2020, photo slide (film scan), 38 pieces, sound
<한라산 no.1>, 2020, acrylic on canvas, 175 × 206.5 cm, set of 9
익숙한 대상에게서 낯선 감각을 느끼는 순간이 있다. 서현은 가족을 잃는 아픔을 겪고 난 후, 사라짐은 어떤 예고도 없이 찾아옴을 깨닫는다. 가족을 볼 때, 안락함과 불안함 사이의 낯선 감정은 고요한 물결과 거친 파도 사이의 잔물결 같다. <잔물결>은 의도적으로 가족과 시선을 마주치려 노력하며, 그 때의 감정을 담은 사진 작업이다. <한라산 no.1>은 서현이 코로나 19로 인해 서울 작업실을 떠나 고향 제주에 머무르게 되며 시작한 회화 작업이다. 예상치 못한 제주 생활을 하며 이전과 다른 제한적 생활 범위에 점차 익숙해지던 서현은 익숙한 제주의 풍경이 예전과는 다르게 다가온다. 그 중 하나는 한라산을 가로지르는5.16도로다. 유년기 때부터 지나온 길이지만, 일순간 헤드라이트에 비치는 나무 기둥 사이의 깊은 어둠이 낯설다. 서현은 낯선 감각을 확대하기 위해 불빛이 어둠 속을 비집고 틀어지는 기이한 형상을 여러 개의 캔버스로 조각내고 이어붙인다. 반복되는 밤의 풍경을 담은 캔버스 조각들은 어딘가에 새로운 일부 캔버스가 존재할 수 있다는 공간의 확장 가능성을 알린다. (글. 김혜진)
⟪미리 찌는 살⟫ 2차(2020. 9. 1 – 9. 11) 참여작가 및 작품들에 대하여
김민주
김민주, <무제>, 2020, paper, modelling paste and oil on plywood 73 x 60.5 x 1.7 cm
김민주, <무제>, 2020, paper tape, modelling paste, gesso and polyethylene sheet on plywood 40 x 30 x 0.5
말은 내재된 의도를 알리는 가장 효율적인 수단이지만, 때론 왜곡된다. 민주는 어떤 주제로 작업을 하면, 후에 그 감정이 해소되거나 왜곡되었을 때 공허함을 경험한다. 소화되지 않고 계속해서 타오르려면 오히려 뜨겁지 않아야 한다. <무제>는 고요하게 오직 주어진 재료와 소통하면서 민주가 평소에 가졌던 생각들을 조형적 언어로 이상화한 작업이다. 나무 패널에 담긴 것이 무엇이던, 무엇이 아니던, 보는 이가 자신의 언어로 해석하기를 바란다. 그것이 민주가 추구하는 작업의 연장선이다. (글. 김혜진)
김소이
김소이, <The Elevator>, 2019, moving image, 1 min 50 sec
소이는 ‘시선의 오해’를 직접 겪은 후 의미 없이, 그저 바라만 본 시선으로 인하여 오해가 생기는 지점들을 목도한다. 얼굴을 가린 채 살지 않는 이상(가린다 해도) 우리는 시선과 표정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의도치 않은 오해에도 해명조차 할 수 없는 일이 다반수다. 완벽한 타인과 만나는 상황은 아주 잦다. 특히 우리는 엘리베이터에서 일면식이 없는 타인과 수없이 문을 사이에 두고 마주한다.
<The Elevator>는 낯선 타인과 대면하는 엘리베이터에서의 상황을 담은 애니메이션 작업이다. 엘리베이터 속 형상들은 ‘아무렇지 않은 시선’을 장착한 채 부유하고, 긁적이고, 뚜벅인다. 영상을 보는 이는 화면 속 인물들과 마주하며 멍하니, 그들과 같이 ‘아무렇지 않은 시선’인 채로 스크린을 바라본다. 소이는<The Elevator>를 통해 어떠한 뜻도 없는, 상대를 응시할 뿐인, ‘아무렇지 않은 시선’, 그 시선에 적응하기를 시도한다. 강제적으로 관객은 4채널 속 같은 공간에서 끊임없이 부유하는 대상들을 바라보며 대면할 수밖에 없다. (글: 김혜진)
김소이, <복제하는 빛>, 2019, moving image, 2 min
류시연
류시연, <아이돌 (음악의 세계)>, 2020, acrylic on canvas, 100 x 131 cm, set of 4
류시연, <아이돌의 동성애적 퍼포먼스>, 2020, acrylic on canvas, 130,5 x 136.5 cm, set of 6
다수의 사람이 모이면 집단이 되고, 집단이 생기면 논쟁이 일어난다. 논쟁은 불명한 음모들을 낳는다. 아이돌 계에서도 이를 피할 수 없었다. 시연은 아이돌 문화, 음악을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각종 음모론을 접한다. 시연은 이를 새로이 스토리텔링 하면서 그들을 향한 ‘음모론’ 속에서 어떻게 대상화되는지, 그럼에도 멈추지 않고 자신의 음악을 표현하는지 보여준다. 자신이 긍정적으로 생각한 대상을 누군가는 부정적 시선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무엇이 ‘옳은’ 시선일지는 그 누구도 알 수도, 결단할 수도 없다.
<아이돌 (음악의 세계)>는 아이돌이 상징적인 가사를 통해 사탄을 숭배한다고 주장하는 음모론에서 시작한다. 오른쪽 사람의 머리에 달린 뿔은 ‘바 포맷의 뿔’을 상징한다. 빨간 태양 가까이에서 악기를 연주하거나 춤을 추지만, 결국 불타 재가 된다. <아이돌의 동성애적 퍼포먼스>는 아이돌 계에서 동성애적 문화가 성행하고 있고, 인구수를 감축시킬 목적으로 동성애 사상을 전파한다고 주장하는 음모론을 바탕으로 한다. 좌측 하단에 맞잡은 손동작은 비밀결사체가 서로를 알아보기 위해 만든 손동작이다. 화면 속 아이돌들은 자발적으로 퍼포먼스를 진행하는 것이 아닌, 권력에 의한 ‘도구’로서 소비되고 만다. (글. 김혜진)
이예지
이예지, 가리운 혹은 가려진, 2020, acrylic on cotton, 145 × 116
이예지, 분기점, 2020, acrylic on cotton, 110 × 103
이예지, 누군가의 신념, 2020, acrylic on canvas, 145.5 × 112.5
사람의 감정은 언어로 표현하는 데에 한계가 있다. 표현할 수 있는 어휘는 제한적이지만 그 크기가 고정적이지 않으며, 발생하는 원인도, 드러내는 방식도 사람마다 다르다. 그 때문에 타인의 감정에 관해 설명을 듣는다고 해서 타인을 완전히 이해하는 것은 어렵다. 서로의 감정에 공감하지 못하는 상황은 사람들 사이를 멀어지게 해 심리적 고립감을 유발한다. 예지는 언어만으로 전달하기 어려운 감정의 흐름을 시각적 매체로 풀어서 드러내고, 감정의 가시화를 통해 사람들 간의 단절을 해소하고자 한다. 그림 안에서 크게 뻗어 나가는 붓질로 표현된 감정은 인물의 안팎으로 흐르며 타인과 선을 긋기도, 인물 간의 교류를 일으키기도 한다. 확연히 구분되는 인물 간 감정의 표현은, 사람들이 공유하는 ‘감정의 언어’가 가지는 다양한 스펙트럼을 보여주며, 동시에 예지 개인의 언어로써 예지의 감정이 흐르는 방식을 가시화해 예지 스스로가 타인과 소통하고자 하는 시도를 드러낸다.(글.김서인)
유수민
유수민, <삶은 살>, 2020, fabric, life size
<삶은 살>은 수민의 이전 작업 <I feel my brain>에서 시작됐다. <I feel my brain>은 수민의 내면을 현실로 구현한 오브제로, 천이나 솜과 같은 가벼운 옷감 소재가 동물의 장기처럼 비틀려 아래로 처진 모습을 띤다. 이는 얇고 잘 부스러져 실체가 없는 것 같지만 모여서 무게를 갖고 가라앉는 수민의 우울한 감정을 드러낸다.
<삶은 살>은 수민의 이러한 감정을 옷으로 만든 작업이다. 실제 사람의 크기로 만들어진 이 옷은 각 신체에 맞는 유닛을 갖추고 있으며, 입고 벗는 것도 가능하다. 그러나 옷감으로 만들어져 옷과 유사한 구조를 갖췄음에도, 사람들이 <삶은 살>을 옷으로 인식하기는 어렵다. <삶은 살>은 우리가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옷의 장식적 기능을 전혀 수행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수민은 <삶은 살>이 반드시 ‘옷’이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삶은 살>이 옷으로서 기능하는가는 우울함이 감정으로서 기능하는가와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수민은 사람들이 이상적이지 않은 형태의 <삶은 살>(우울함)을 평범한 옷(감정)으로 인정할 때, 사회가 규정하는 정상성의 조건이 파괴된다고 믿는다. 그것은 ‘옷’으로 은유 되는 외면에 관한 조건일 수도, ‘감정’으로 표현되는 내면에 관한 조건일 수도 있다. 내면(감정)을 뒤집어서 외면 세계의 매체인 옷으로 만드는 행위는 수민이 자신을 비정상으로 규정하는 사회에 당당하게 맞서는 방식이며, 자신의 상태가 얼마나 ‘정상적으로’ 기능하고 있는가를 밝히는 수민의 목소리가 된다.(글.김서인)
정민
정민, <ㄱ>, 2019, moving image, 2 min 20 sec, color, sound
정민, <ㄱ2>, 2020, moving image, 4 min 10 sec, color, sound
그토록 선명했던 기억은 때로는 나눌수록 흐려진다. 민은 과거에 살았던 집에 대해 가족과 이야기를 나누다 각자가 기억하는 집의 이미지가 다름을 목격한다. 침대의 위치, 의자의 방향, 커튼의 색까지도 각자의 기억 속의 실재가 점차 희미해진다. <ㄱ>, <ㄱ2>는 과거 살았던 집에 존재했던 선풍기부터 시작해 집의 기억이 서서히 잊혀지는 이야기를 스톱 모션으로 풀어낸다.(글.김혜진)
정민, <낡은 서랍>, 2020, pigment print, set of 35
<낡은 서랍>은 민의 할머니를 대상으로 한 사진 작업이다. 할머니 댁의 구석구석을 들여다보니 많은 것이 할머니처럼 나이가 들어 있다. 뜯어지고 빛 바랜 것들을 바라보던 시선의 끝에는 그와 닮은 할머니가 있다. 가족들 모두가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을 알고 자신의 방식으로 마음의 준비를 한다. 민 또한 할머니를 자신의 방식으로 기록하고 기억한다.(글. 김혜진)
최서현
최서현, <무제 (일상에 관한 일기)>, 2020, drawing on cotton canvas, 144 × 192.5 cm
서현은 코로나19 이후에 예상치 못하게 본가에 오랜 시간 머물게 되며, 바뀐 일상에 대해 주목하게 되었다. 낯선 상황은 익숙한 공간조차 사뭇 다른 인상을 갖게 한다. <무제 (일상에 관한 일기)>는 어린 시절 끄적였던 그림 일기 형식처럼 자신이 무엇을 먹었고, 보았는지에 대한 단편적인 것에서 점차 그 행위에서 도출되는 감정, 생각으로 확대되는 드로잉 작업이다. 결과물을 계획하고 도출하려는 페인팅에서 벗어나, 빈 공간을 채워가며 자유로운 행위를 하는 ‘태도’에 집중한다. 서현의 일상이 담긴 선들은 서로 묶이고, 섞이고, 분해되면서 이야기를 확장시킨다.(글. 김혜진)
탁무겸
탁무겸, <하슬라>, 2020, acrylic on canvas, 146 x 91 cm, set of 2
탁무겸, <물길손잡이>, 2020, acrylic spray on resin, 29 x 15 x 11 cm
탁무겸, <넋 – 1>, 2020, acrylic spray on resin, wood, 38.3 x 39.5 x 39.5 cm
탁무겸, <넋 – 3>, 2020, acrylic spray on resin, 32.3 x 45 x 33 cm
현대 사회에서 분명히 민주주의라는 프레임이 작용하고 있지만, 막상 주변을 돌아보면 민주주의의 탈을 쓰고 본인의 이득을 취하는 이들이 많다. 그 행동들을 당연하다 치부하며, 자신의 자본을 이용해 가해적 행동에 대한 처벌을 막고 합리화한다. 현 세태를 외면하는 시선들을 본 무겸은 이성을 가진 인간으로서의 박탈감이 온다. 문득, 이런 사람들을 통제하고 정화시킬 사회적 시스템이 있으면 좋겠지만, 당장의 현실 속에서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체감한다.
무겸은 작가로서 인간들을 정화하고, 정화된 인간이 선한 존재로 태어날 수 있기를 바라며 유토피아적 세계관을 구축한다. 어릴 적부터 직, 간접적으로 접했던 다양한 종교 문화에서, 공통적으로 신은 인간이라면 지켜야 할 어떠한 ‘범주’를 제시한다. 무겸은 이번 시리즈를 통해 인간으로서 무엇을 배워야 하는지, 무엇이 영순위가 되고, 당연한 것인지를 보여주고자 한다.(글. 김혜진)
한진
한진, <신기루>, 2019, oil on canvas, 130 × 162.3 cm
한진, <기억합성>, 2020, HD video, 2 min 20 sec
우리가 기억이라고 부르는 과거의 상황과 감정은 과거 한순간에 벌어진 사건일 뿐, 다시 떠올리는 과정에서 현재에 남아있는 기록과 변화한 상황에 의해 전혀 다른 사건으로 전환된다. 진은 기억을 가변적인 것으로 보고 사람들이 자신의 기억이 과거와 같은 것인지 의심하도록 한다.
<신기루>는 진이 친구들과 떠난 여행을 기록한 그림이다. 진은 과거에 야경을 보고 느꼈던 감정을 되새기기 위해 이 그림을 그렸지만, 현재에는 어딘가로 떠나지 못하게 된 상황으로 인해 ‘그리움’이라는 새로운 사건을 맞이하고 있다. <기억합성>은 영정사진 합성 포맷을 반복적으로 등장시키는 영상작업이다. 이 포맷은 영정사진을 촬영하지 못하고 갑작스럽게 사망한 고인을 영정사진의 사회적 양식에 맞춰 남기기 위해 만들어진 것으로, 마치 고인의 신체인 것처럼 합성되지만 실제로는 고인의 신체가 아닌 부분이다. 진은 고인의 것이 아닌 것조차 나중에는 고인의 일부인 것처럼 기억하게 되는 오류를 드러내, 사람들이 기억하는 고인이 실제 고인에 기반한 것인지 다시 생각하는 계기를 만들고자 한다.(글.김서인)
미리찌는 살
2020. 8. 17 – 8. 28
김민주, 김소이, 손지형, 송민지, 유수민, 정민, 조휘경, 최서현
2020. 9. 1 – 9. 11
김민주, 김소이, 류시연, 유수민, 이예지, 정민, 최서현, 탁무겸, 한진
기획. 김서인, 김혜진
제안. 이성휘
도움. 박형지
그래픽 디자인. 박주하
사진 촬영. 이석기
공사. 김준호
설치. 준아트, 미지아트
인스타그램 @fatten.up.for.tomorrow
Fatten Up for Tomorrow
Aug 17-28, 2020
Minju Kim, Soyi Kim, Jihyeong Son, Minji Song, Suemin Yoo, Min Jeong, Wheekyung Jo, Seohyun Choi
Sep 1-11, 2020
Minju Kim, Soyi Kim, Siyeon Yoo, Suemin Yoo, Yejee Lee, Min Jeong, Seohyun Choi, Mugyeom Tak, Jin Han
Curators Seoin Kim, Hyejin Kim
Proposer Sunghui Lee
Advisor Hyungji Park
Graphic Design Juha Park
Photograph Seok Ki Lee
Construction Junho Kim
Installation Jun Art, Miji Art
Instagram @fatten.up.for.tomorro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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