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리

Lily

릴리 

어떤 사람이나 장면, 사물과 관계를 맺으며 멜랑콜리함, 정적임, 안전함 같은 것을 발견할 때 서정적이라 말하곤 한다. 부드러운 전개로 가득하고 소란스럽지도, 위험천만하지도 않은 것을 마주할 때 말이다. 멀리서 보건 들여다보건 내가 나를 안전하게 내려둘 곳이 보일 때, 그것은 서정적인 것이 된다. 그런데 애석하게도 냉소 섞인 무관심이 우리의 진지한 교류가 자리한 곳을 대신하려는 모습을 본다. 그런 순간마다 서정성은 말로 불리지 못하고, 스스로를 존립하도록 이끌던 그 의미가 지닌 효력도 잃고 만다.

그럼에도 서정성을 찾는 일은 계속된다. 눈과 손과 입을 제한한 냉소와 무관심의 울타리를 넘고자 하는 의지가 솟아나기에, 저 너머로 들어가 위안을 얻으려 하기에, 그 속에서 친근함을 얻을 수 있음을 알기에. 효력을 잃었음을 알고도 둘러본다. 말로 부를 수 없음을 알면서도 불러본다. 뒤집고 헤집어 결국 입 밖으로 꺼내본다. 탈색될 대로 탈색되고 닳을 대로 닳았음에도 어찌할 도리 없이 반복해서 길어 올린다. 어쩌면 길어 올려진다는 그 사실이 지금 이곳, 서정성에 부여된 새로운 역할인지도 모른다.

《릴리》는 그런 서정성을 길어 올리게 하는, 그것에 부여된 또 다른 역할을 감각하게 하는 네 사람을 불러 한곳에 모았다. 자신과의 추억이 깃든, 그러나 실존하지 않는 대상을 그린 김현진은 그 사실로 인해 진실성이 의심받는 순간을 빚어낸다. 그런 그림들 사이에서 김지우는 거시사와 미시사의 경계를 다루며 불균형이 가능해질 때를 말한다. 한 편에는 평범한 사물의 표면을 다듬어 아무것도 아닌 장면에서부터 서스펜스에 가까운 사건으로까지 확장해보려는 강동호가 있다. 그 저편, 도형, 숫자, 기호, 글자가 지닌 모양을 촘촘히 쌓는 동시에 흩트리며 리듬을 찾아가는 김현우의 그림이 서 있다.

어설픈 피아노 연주가 귀를 간지럽히고, 자꾸만 의심이 드는 그림이 시선을 방해하고, 치밀함으로 위장한 형태들이 눈에 밟힌다. 시와 도표 위에서 꾸며낸 이야기와 진실된 이야기가 겹치고 어긋난다. 그 속에 나를 안전히 내려둘 자리가 한 곳도 없었다고 단언할 수 있을까? 멜랑콜리나 정적임을 마주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고 속단할 수 있을까? ‘릴리’는 백합(lily)을 의미하지도, 서정(lyric)을 지시하지도 않는다. 두 단어를 배회하기만 하는 자신의 상황을 자전적으로 은유할 뿐이다.

 

2021년 봄, 김현우의 작품을 망라한 책 속에서 그림 하나를 보았다. 2011년에 그려진 그림은 두 쪽을 가득 채웠다. 아지랑이 피듯 흩어진 스크래치 사이에, 종이와 종이를 가르는 선 위에 커다란 십자가가 겹쳐 있었다. ‘픽셀 킴’이라는 이름답게 조각 난 픽셀을 쌓아 그린 그림과는 사뭇 달랐다. 다른 그림이 인쇄된 쪽을 여러 번 펼쳐보았다. 점점 그 그림에 들어있던 픽셀이 보였고, 도통 눈에 담기지 않던 스크래치와 십자가가 눈에 담겼다. 

 

나는 김지우가 사랑을 다룬다고 생각했다. 감기가 그렇듯 스스로도 알아차릴 새 없이 왔다 가는 아스라한 사랑 말이다. 우리가 처음 대화를 나누고 한참 지나 서정성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냐는 나의 물음에 그는 이렇게 답했다. “지저분한 호텔에 방문했는데 그곳 화장실에서 뜬금없이 클래식이 흘러나오는 상황을 떠올렸어요. 우아한 공간에 있는 것 같지만 내가 정말로 느끼는 것은 그렇지 않을 때. 그런 격차에서 오는 감각이 아닐까요?” 그런 그에게 혼자가 된다는 건 외로움으로만 내칠 수 없는 것이었다.

 

김현진의 그림에는 분명 무언가가 있었다. 그가 그린 장면은 실제로 겪은 적 없는, 그의 머릿속에만 있는 이야기였다. 명백한 상상이라는 점에서 진실성, 진정성, 정당성 같은 것을 의심했다. 그런데 그림을 들여다볼수록 의심이 사그라들었다. 한번은 꿰맨 상처가 새겨진 벽지를 그린 그림을 보았다. 그는 내게 감정 없이 몸을 다루는 방 주인이 부러웠다고 전했다. 추억이었다. 만질 수 없고 볼 수 없이 그저 떠올리기만 한 것과 나눈 모조의 추억. 그림에서 보았던 건 그가 대상에 가진 애처로움이나 애정이었을지도.

 

손에 든 것 없이도 자로 길이를 재고 각도기로 각을 맞춘 듯 잘 재단한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 있다. 말썽을 피우지도, 장난을 받아주지도 않을 것 같은 그림이고 사람이다. 그렇게 상징과 이야기는 담기지 않은 채 냉철한 눈과 손으로 만든 형태만이 그림 위에 얹혀 있다. 우습게도 그 치밀함 사이로 틈을 보았다. 과도하게 치밀한 그림은 결국 넘쳐흐름으로써 빈틈을 만들었다. 그런 빈 곳을 발견하고서 나는 편안하게, 그리고 오랫동안 강동호의 그림 위에 시선을 둘 수 있었다.

 

 

 

릴리
2022. 7.27―8.21
수―, 오후 1시―7

 

참여작가
강동호
김지우
김현우
김현진

기획
김진주

제안.협력
윤율리

포스터.로고 디자인
무늬 저널

리플렛 디자인
알음알음

사진
고정균

 

 

 

 

 

Lily
2022.7.27―8.21
Wed―Sun, 1pm―7pm

Artists
Kang Dongho
Kim Jiwoo
Kim Hyunwoo
Kim Hyunjin

Curated by
Kim Jinju

Suggestion·Cooperation
Yoon Juli

Poster・Logo design
Munui Journal

Leaflet design
al-eum al-eum

Photography
Goh Jeongkyu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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